반복적 자해는 자살 의도가 없이 자신의 신체 표면에 고의적으로 출혈, 상처, 고통을 반복해서 유발하는 행동입니다. 지난 십 년 사이 반복적 자해 환자들을 진료실에서 만나는 빈도가 부쩍 늘었습니다. 특히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의 연령대에서 반복적 자해가 많이 관찰됩니다. 전통적으로 손목을 긋는 행위 같은 자해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정신건강의학과 영역에서는 ‘경계선 인격장애’의 특징적 증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경계선 인격장애 환자들은 타인의 관심을 끌거나 대인관계 조정 또는 취약한 자아 기능으로 발생한 해리 현상 중단 등의 다양한 이유로 자해를 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임상 현장에서 보게 되는 반복적 자해는 경계선 인격장애로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 많습니다. 또한 반복적 자해를 경계선 인격장애의 병리적 특징적 증상(pathognomonic sign)으로 본다면 치료하기 까다롭고, 예후가 불량하며, 장기간 병리가 지속되는 상태의 환자로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편견이 작동할 위험이 있습니다.1
반복적 자해를 경계선 인격장애 증상의 한 범주가 아닌 특징적 증후군, 혹은 증상 범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장기간 만성적 경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 경계선 인격장애와 달리, 반복적 자해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수년 이내에 문제가 해소되고 정상생활 범주로 복귀하는 사례가 상당히 많았습니다.이런 차이점이 부각되면서, DSM-5에서는 ‘비자살적 자해 (non-suicidal self-injury, NSSI)’라는 독립적 진단이 등재되었습니다.2 이 진단 기준에서는 환자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체 표면에 직접 손상을 입히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자살을 의도한 것이 아니며, 문신이나 피어싱과 같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은 배제하는 것으로 제한했습니다. 반복적 자해(repetitive self-mutilation)로 정의를 하는 경우도 이와 유사하나, 여기에 ‘전반적 지적 손상(general cognitive impairment)’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이 포함됩니다.1,3 이와 같은 관점에서 반복적 자해를 하게 되는 심리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은 환자를 더 깊이 이해하고, 치료를 이끌어가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반복적 자해는 심층심리에서 비롯된 결과물인 행동 표현형이기 때문입니다.
반복적 자해는 일반적으로 평균 10대 중반에서 시작하여 20대 중반까지 지속되는 양상을 보입니다.
NSSI의 국제적 유병률을 추정하기 위한 지역사회 기반의 메타분석 연구 결과(Swannell SV, et al. 2014.)에 따르면, NSSI의 유병률은 청소년(10-17세)에서 17.2%, 초기 성인기(18-24세) 13.4%, 성인기(25세 이상) 5.5%로 보고되었습니다.4호주에서 15~29세의 청소년 및 젊은 성인 1,943명을 대상으로 시행된 인구 기반 코호트 연구 결과(Moran P, et al. 2012.)에 따르면, 반복적 자해는15~16세를 전후한 시기에 가장 비율이 높았고 20대 초반이 되면서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습니다. 이 중 반복적 자해는 8% 정도였고, 여성이 남성보다 많았습니다(10% vs. 6%).5
반복적 자해가 청소년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는 데에는 SNS에 의한 영향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자해행위를 학습하고 모방하면서 자해를 시작하게 되는데, 10대 청소년들에게는 이 행동이 집단 내 자신만의 지위를 점유하는 행위의 하나로 해석되는 경향도 있습니다.1
자해를 반복하는 것은 자아의 기능이 취약하다는 신호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외부와의 소통, 현실검증력의 일시적 저하가 오면서 해리 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다시 현실검증력을 되찾고, 자아가 자신을 재통제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강한 통증을 유발하거나 피를 보는 자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제는 중증의 경계선 인격장애뿐만 아니라 조현병 등에서도 자주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취약한 자아를 가진 개인은 또렷하게 눈에 보이는 상처를 내어 이를 확인하고, 강한 고통을 느끼는 것으로 생존을 확인합니다. 시각적으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며 비로소 해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고, 흐트러졌던 자아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재정립됩니다. 그런 면에서 자해는 정신적인 응급상황에 대처하는 기능을 합니다. 비록 자해 자체는 해로운 행동이지만, 통제할 수 없는 정서적 고통에 압도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길 때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형태로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차선책을 택한 자아의 타협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1
대상관계 이론적 측면에서는 자신과 외부 사이의 경계(boundary)가 불분명해진 것을 다시 명확히 하기 위해 자해를 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취약한 내적 자기-대상 표상을 가지고 자란 사람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쉽게 경계 붕괴의 위험을 느낍니다. 개인은 조각조각 부서지는 느낌, 공허함, 비현실감, 내면의 죽음과 같은 공포스러운 감정을 경험합니다. 자해 행동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경계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자해행위를 통해 자신의 몸과 현실 세계 사이의 경계를 다시 정립하고, 자아와 몸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보이지 않는 심리적 경계보다 가장 확실하게 나와 ‘내가 아님’을 구별해 주는 것은 바로 ‘피부’입니다.
피부의 존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이고 원초적인 경계선입니다. 이 경계의 관점에서 피부 안과 밖은 나와 내가 아님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원인으로 정신세계가 혼란해지고, 그 경계가 불분명해질 때, 자해를 하는 것은 피부라는 경계선을 다시 확인하는 것으로 작동합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잠시 중단되고 경계가 명확해지며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 경계 짓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다시 자해행위를 반복하게 됩니다.1
우울증상은 정신분석적으로 자기에 대한 공격성으로 해석됩니다. 자존감이 낮거나, 자기 혐오가 강한 우울증 환자의 경우 부정적인 자기상을 내재화합니다. 자신을 내재적으로 틀리고, 더럽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인식한다면 자신을 파괴하는 것, 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데, 그것이 자해 행동인 것입니다.1,6
10대 중반에 자해가 처음 시작되며 많이 관찰되다가 20대에 줄어드는 것은 정신발달적 측면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청소년기에 피아제의 형식적 조작기가 시작되는데, 추상적 사고, 상징의 원활한 사용 등이 그 특징입니다. 자신이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이 시기에 발달합니다. 만일 언어화나 상징화를 하는 능력의 발달이 아직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이 잘 분화시키거나, 세세하게 인식하기 어려운 갈등의 감정이 강해질 때, 이를 적절히 언어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어로 표현하여 감정을 조절하거나, 솟아오르는 감정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지금 느끼는 감정을 세분화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행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7,8 이때 부정적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경우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행동이 나타날 수 있고, 부정적 감정이 자신의 내부로 향하게 되면 자해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후 정신발달을 충분히 하게 되어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이 성숙되면 감정이 격해지거나 통제하지 못할 때마다 자해로 지금의 감정 상태를 나타낼 필요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20대 중반이 되면 반복적 자해의 빈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반복적 자해는 다양한 심리상태를 반영할 뿐 아니라,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자아심리, 대상관계이론, 정신발달적 측면에서 여러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 자해행위를 하는 환자를 진료할 때 이와 같은 면들을 함께 고려한다면 더 넓고 통합적으로 평가하고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자료는 건국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하지현 교수가 직접 작성한 기고문으로, 한국룬드벡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