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 한 여성이 들어옵니다. 단정한 외모지만 주변 경계를 많이 하며 저의 눈치를 살핍니다. 의심이 많은 것 같진 않지만, 저에게 뭔가를 의지하고 싶은데 그게 불안한 느낌입니다. 한참을 말을 돌리며 다른 이야기를 하더니 어느 순간 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자신이 직장 상사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이야기합니다. 상황을 듣고 보니 일의 성과를 착취할 뿐 아니라 부적절한 성추행까지 분명한 피해를 입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상사에게 부당함을 호소하면 오히려 상사가 윽박지르며 자신을 무능력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폄하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상사 자신만 믿으면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이런 상황이 만성화되며 그녀는 이 부당한 상황에서 점점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사이 가족이나 친구들과도 멀어지며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도 혼자 남아 버렸습니다.
필자는 어쩌다 보니 ‘가스라이팅(gaslighting)’과 관련된 언론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문제나 범죄와 관련한 시사 다큐 방송에 출연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러한 기회로 자연스레 가스라이팅과 관련된 지식을 찾아보면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상황을 분석해 보려 했습니다. 물론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정신의학적인 용어는 아니나, 어느 순간부터 우리나라 대중들 사이에서도 이 용어가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2022년에는 가스라이팅이 미국에서 올해의 단어로 선정되었을 정도이니 다양한 사회 현상을 가스라이팅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건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 현상인 것 같습니다.1
가스라이팅은 이익을 위해 타인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가스라이팅의 어원은 많이 아시다시피 1938년 연극 "Gaslight"에서 비롯합니다.1 최근 들어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가 너무 남발되는 경향이 있으나 그만큼 사람들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상황을 더 마주하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스라이팅에 대한 인식은 정말 가스라이팅적 상황이 사회적으로 늘어서일 수도 있고 이전에는 당연시 여겼던 상황을 사회적 개방성으로 인해 이제야 가스라이팅으로 인식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스라이팅은 일대일의 대인관계에서도 발생하지만, 개인과 조직 간에도 발생할 수 있고 가짜 뉴스와 같은 정치적 선동을 통해 대중과 사회 간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진료를 보다 보면 위에 언급된 가상의 사례처럼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트라우마 상황을 마주하곤 합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 선생님께서도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직장 내에서도 그렇지만 연인 관계나 가족 안에서도 폭행이나 학대 등을 포함한 가스라이팅이 있습니다. 가스라이팅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그중 주요한 요인으로 우선 한 개인이 다른 사람 또는 집단과의 관계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분명한 피해를 만성적으로 입어왔고, 상대방과의 관계 형성이 이중구속에 기반하며, 사회적인 관계가 폐쇄적으로 제약되어 있다면 가스라이팅적 상황으로 고려합니다.
‘이중구속(double bind)’ 또는 ‘이중 메세지(double bind message)’는 서로 모순된 행동이나 말을 반복하면서 상대방의 판단력을 점차 무력하게 만듭니다. 그 무력해진 판단력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주변의 다른 관계를 방해하고 막는다면 가스라이팅적 관계는 지속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가스라이팅이 다 범죄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가스라이팅도 분명 존재하고 진료 상황에서도 마주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상황을 파악해 법적, 행정적 조치가 진료와 별도로 취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진료 상황에서는 무의식적인, 의도적이지 않은 가스라이팅을 더 많이 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가스라이팅은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에서 오랜 기간 만성적으로 쌓인 관계의 패턴이 한쪽에 서 다른 한쪽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쪽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각자의 성격적 요소가 이런 관계 형성에 반영되는 편입니다.
대표적으로 ‘자기애성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가 상대방을 가스라이팅을 하기 쉽습니다.2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지다 보니 이런 착취적 관계가 고착되어 버리고 벗어나려고 해도 계속 끌려가 버립니다. 그렇다 보니 가스라이팅에서는 피해자가 가스라이팅 상황을 개선하려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럴 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가는 것도 필요합니다. 치료적인 측면에서는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도록 돕는 과정이 이어져야 하겠습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가스라이팅이 의료적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의료적 가스라이팅(medical gaslighting)’은 주로 여성이나 성소수자, 인종 등 사회적 약자에서 의료적 차별이 있음에도 마치 정상적인 진료를 하는 것처럼 위장되는 경우를 말합니다.3 아무래도 의료 환경에서 의사가 지위적으로 우위에 있고 환자 입장에서는 신체적으로 의사를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료인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이런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기 쉬운 상황이 됩니다. 특히 오랜 기간 지속된 코로나 상황에서는 코로나 환자들이 합병증이나 동반 질환이 있어도 단순히 코로나 환자로 매도되면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악화되는 상황이 흔하게 발생했고 이 역시 의료적 가스라이팅에 해당됩니다.4
의료적 가스라이팅은 정신과 진료상황에서도 발생합니다. 어쩌면 더 호발할 수 있습니다.
정신과에서 의료적 가스라이팅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의사와 환자 관계에서 라포(rapport)를 넘어서 의존적 관계가 만들어지며 발생하는 가스라이팅입니다. 이 경우는 과거 정신분석이 주류를 이루었던 시기부터 주요하게 다루어져 온 단골 주제입니다. 그렇기에 치료적 관계가 이런 가스라이팅적 상황으로 가지 않고 치료적인 관계에 머무르기 위한 교육과 제도가 만들어져 있는 편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료 상황에서 환자가 호소하는 실제 표현보다는 정신병리적 진단으로 환자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정신과 진료의 특성상 객관적인 검사로 진단이 어렵다 보니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에 입각해서 진단 하고 치료하게 되는데, 어느 순간 환자의 호소보다는 진단을 우선시하면서 바라보고 환자에게도 스스로를 정신과 진단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정신과 레지던트 시절, 교수님으로부터 경계선 성격장애나 조현정동장애를 함부로 진단하면 위험하다고 배운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겁니다. 정신과 진단에서 DSM 체계의 발전은 분명 정신과 진단에서 일관성을 만들어 주기는 했지만, 치료적 접근이 처음 진단된 병리적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고 현재 환자가 호소하는 내용은 간과하게 하는 부작용 역시 만들어냈습니다.5
가스라이팅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해서는 상황에 따라 워낙 다방면의 대책이 필요하기에 간단하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정신과 진료 상황에서 의학적 가스라이팅에 대한 원칙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진료상황을 끊임없이 파악하려는 노력입니다. 이건 의사 스스로가 지금 환자와의 관계를 바라보고 환자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과정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료 이후 피드백을 듣는 것입니다. 이건 환자에게 직접 들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있는 동료나 수퍼바이저를 통해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너무 당연한 것이기에 간과하기도 쉽습니다. 당장 저만 하더라도 이 글을 쓰면서 그간 진료를 하면서 놓쳤을지 모를 여러 가지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관계에서의 기본을 놓칠 수 있는 상황은 비단 진료에만 국한되지 않는 듯합니다.
크고 작은 사회 안에서 알게 모르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스라이팅 상황에서 우리는 얼마나 그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 듣고 파악하려 노력했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어 보입니다.
본 자료는 마인드랩 공간 정신건강의학과 이광민 원장이 직접 작성한 기고문으로, 한국룬드벡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